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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귀 자른 이유, 그의 삶 속으로.

by 구오씨 2023. 1. 19.

고흐 자화상

 

 

 

 

고흐, 그는 누구인가?

미술 혹은 그림등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지 얼마안된 저에게도 너무 익숙한 이름, 고흐. 학생시절 미술교과서에서 너무나도 많이 봐왔던 인물이자 예술계에 역사로 남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can Gogh)'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개혁교회 목사인 아버지 테오도로스 반 고흐와 네덜란드 정부 소재지인 '헤이그'의 부유한 가정 출신의 어머니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튀스 사이에서,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주 쥔더르트에서 1852년 3월 30일에 태어났으며, 1988년 12월 23일에 그는 아를 사창가의 여성에게 자신의 잘린 왼쪽 귀를 건내는 사건으로 인해 1889년 5월 8일 생레미의 한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그로부터 1년이 조금 지나서 미완성된 마지막 작품 <나무 뿌리>를 끝으로 1890년 7월 29일 생을 마감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잘 알려져있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 주제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고 합니다. 그는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로 무려 900여 점의 그림과 1100여 점의 습작 등 그의 모든 작품은 정신질환을 앓고 목숨을 끊기 전까지. 단 10년동안에 만들어낸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고 목숨이 끊어진 후에야 성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나 11년이 흐른 1901년 3월 17일 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을 전시한 후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탈인상주의 화가로 '탈인상주의(후기인상주의)'는 인상주의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품세계를 확립하고자 하는 예술 사조였습니다. 그 밖에도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 표현주의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으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분야에도 영감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빈센트의 유화 작품이 유명해진 탓에 사실은 그가 훌륭한 소묘 화가라는 사실이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소묘 작품은 미술가 이력의 초기부터 존재했으며 그의 삶 마지막까지도 제작이 되었다고 합니다. 1888년 여름 한동안은 비싼 유화 물감 비용을 줄이기위해 전적으로 소묘만을 그렸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를에서 자란 갈대를 재료로한 직접 만든 펜을 도구로 사용하기도하고, 새로운 표현 기술도 개발했습니다. 연필로 밑그림을 미리 그리고 갈대펜을 사용해 아주 다양한 선과 점, 곡선, 나선으로 소재를 표현하였습니다.

 

반 고흐가 그린 몇몇의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순위에 기록되기도 합니다. 1987년 3월 30일에 <아이리스>라는 작품이 뉴욕의 소더비즈에서 5,390만 달러(한화 약 662억)로 거래가 되었다. 그 시절이면 더욱 값지고 높은 금액이라고 생각됩니다. 1990년 5월 15일에는 <가셰 박사의 초상> 첫째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한화 약 1,014억)에 거래되어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후 미국의 수집가에게 4,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귀 자른 이유

그가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르고 치료를 받고 붕대를 한 자신을 그린 초상화 <귀를 자른 자화상>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빈센트 반 고흐가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1888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추운 겨울 밤에 자신의 왼쪽 귀를 면도칼로 자르고 신문지로 싸서 근처의 사창가로 향한 뒤, 젊은 여성을 만나 그것을 건내주었다고 합니다. 놀란 여성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는 왜 본인의 귀를 잘랐을까요? 정확한 이유는 본인외에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남긴 일기와 편지, 그리고 지금까지 발견된 다양한 기록들을 통해서 빈센트 반 고흐가 귀 자른 이유를 3가지로 유추했다고 합니다.

 

고흐가 귀를 자른 이유로 알려진 첫번째 가설 '고갱'과의 싸움 때문이었습니다. 한때는 같이 생활하기도했던 친분이 있는 관계였지만 고흐를 후원하면서 돌보던 동생 '테오'는 고흐에게 지쳐 있었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고갱은 화상이었던 테오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테오의 요청으로 고갱은 고흐와 교류했고, 그들은 편지를 통해서만 교류하다가 서로의 자화상을 교환하면서 예술 공동 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 지붕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서로에게 예술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고흐는 내성적이면서 격정적인 성격이었지만 고갱은 냉소적이고 완강한 그와 정반대의 성격으로 다툼을 피해갈리 없었습니다. 날카로운 말들도 오가면서 결국 '고갱'은 공유생활을 마무리하기로 하였고, 고흐는 분노를 누르지 못하고 고갱에게 욕을 들었던 귀를 잘라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후에 고흐가 동생 '테오'가 나눈 편지가 발견되면서 새로운 가설도 등장했습니다. 고흐가 귀를 자른 날에 동생 '테오'가 보낸 편지를 받게 되는데, 그 편지 안에는 약혼 소식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동안 생활비를 지원해주었던 동생의 약혼 소식에는 지원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생활비를 동생에게 받아 써야한다는 미안함과 자신의 그림을 인정받지 못하는 화가라는 자책감으로인해 힘들었던 시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가설은 동생의 결혼으로부터 1년 후 발생한 '고흐의 자살 사건'에도 뒷받침합니다. 마지막 가설은 자른 귀를 전달했던 여성을 추적해 얻은 단서로 유추된 이야기입니다.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의 곤경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매춘부들이 있는 사창가에서 청소 일을 하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가 광견에게 팔을 물려 고생을 하고 있자, 그런 그녀를 돕고자 그녀의 망가진 피부를 대체할 수 있게 자신의 귀를 주었다는 주장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귀 자른 이유.. 정상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적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그에게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죠?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고흐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에>

빈센트 반 고흐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별이 빛나는 밤에>는 1889년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그려졌다고 합니다. 화가로서 활동한지 얼마되지 않아 또 다른 화가 '고갱'과 함꼐 따뜻한 햇살로 유명한 프랑스 아를이라는 곳에서 공유 생활을 하게 됩니다. 시작은 좋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예술관의 큰 차이가 있었고 날이 갈수록 갈등은 커졌습니다. 고갱은 고흐에게 "돈도 못 버는 화가"라고 비판했고, 고흐는 고갱에게 "돈만 아는 화가"라고 응수했습니다. 이러한 갈등이 계속되던중 고흐는 귀를 자르는 사건 이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생레미의 요양원 입원하게되면서 자신이 보았던 아름다운 밤하늘을 자신의 마음을 담아냈습니다. 그가 그린 밤하늘에는 구름과 대기, 별빛, 달빛이 폭발하듯 보여집니다. 황량하고 짙은 파란색 하늘은 세상의 종말을 연상하게 하면서 그 위의 소용돌이치는 구름은 당시 그가 느꼈던 고통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보색 대비를 이용해 강렬한 그림을 많이 그린만큼 밤하늘을 코발트 블루로 표현하고 그 위에 노란색의 별과 달을 칠해 더욱 생생하게 보이도록 연출했습니다. 남색과 노란색은 보색이기때문에 함께 쓰게되면 더욱 강렬하게 보인답니다.

 

고흐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에>는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그 외에 <감자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씨 뿌리는 사람들>등 다양한 그의 작품은 암스테르담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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